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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연민의 덫에 대한 가장 섬뜩한 보고서-아 지갑 놓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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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3

처음 웹툰을 보던 순간을 기억하세요? 누군가의 추천이 아니면 스스로의 선택으로 봤을텐데, 그렇다면 선택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아마도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웹툰의 가장 큰 매력요인은 그림이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그림이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길까요? 수려한 실루엣의 화사한 색감은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겁니다. 몇 명이나 달라붙었는지 궁금증이 일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한 그림은 때론 궁색한 스토리를 덮어주기도 하고요. 귀여운 캐릭터라도 하나 있으면 더 쉬워집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소개할 <아 지갑 놓고 나왔다>는 위에 나열한 어떤 사항에도 포함이 안됩니다. 흰 바탕, 가늘고 검은 펜선으로 그리는 투박하고 조금은 성의 없어 보이는 단순한 그림은 첫눈에 딱히 매력적이지는 않거든요. 물론 계속 보다보면 이런 그림체야말로 이 작품에 딱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만 말이죠.


이야기는 시작부터 충격적입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홉살 소녀 노루의 영혼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웬 바야바같은 혼령이 함께 등장합니다. 소녀는 천진난만하지 않습니다. 자꾸만 골똘히 뭔가를 고민하는데, 그건 혼자 남은 엄마를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9살밖에 안 된 소녀가 엄마가 보고싶다고 떼쓰고 울기는 커녕, 엄마의 살길을  그 작은 머리로 고민한다는 게요.


노루는 나이에 비해 똑똑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타고나기도 했지만 후천적으로 길러진 것이기도 합니다. 노루의 엄마 '선희'는 어린 미혼모이며, 어렸을 때 겪은 어떤 충격적인 일 때문에 정신적으로 미성숙합니다. 그래서 조숙하고 영리한 딸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댔습니다. 그래서 노루는 늘 성장하며 필요이상으로 똑똑하게 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아홉살입니다. 해결책이라고 찾아낸 건 고작 놀이터에 떨어진 동전을 줍는 것 뿐.


엄마 선희는 어떤 인물인가요? '총체적 난국'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암담한 상황에 있는 여자입니다. 그녀가 가출을 한 건 열 아홉살,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선희가 원래부터 이렇게 노답인생을 살아왔던 건 아닙니다. 남달리 영특해 주변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사촌 오빠 두명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선희의 인생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소름끼치는 사실은 방문 틈으로 큰 어머니는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들 둘에게 어떤 해라도 가해질까봐 모른 척 그 장소를 떠나고 말았던 거죠. 아이들끼리의 장난이 도를 좀 넘었을 뿐이다. 좀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큰 어머니는 당시 제대로 된 사과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에게 가해자의 프레임이 씌워질까 걱정했던 거죠.


그리고 이 사건은 선희의 부모님 사이도 갈라놓았습니다. 선희의 아버지는 자신을 키워준 형의 아이들이 저지른 실수인만큼 한번은 눈 감아주자고 합니다. 그러나 선희의 어머니 '경자'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싸움은 계속 이어졌고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합니다. 모든 것을 묻어두는 댓가로 받은 돈으로 경자는 식당을 차립니다. 선희와 엄마의 이름을 딴 '선경식당'에서 둘은 나름의 행복한 삶을 꾸려보리라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희가 겪은 일은 이미 조용하고도 빠르게 소문이 나버린 뒤였습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자신을 향한 경멸의 시선은 알아보는 법입니다. 소문은 끈질겼습니다. 아무리 전학을 가도 뒤쫓아와 선희를 고립시켰습니다. 언제부턴가 선희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새의 얼굴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현상은 최악의 상황에 처한 자신을 외면했던 큰 어머니의 표정과 자신을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선희의 자기방어기제였습니다. 그러나 경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종교에 귀의합니다. 


종교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경자가 이성의 끈을 모두 놓아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경자가 조금 더 합리적으로 사고를 했더라면, 선희로 하여금 심리치료나 정신과  진료 후 적법하게 약물을 복용하게 했을 것입니다. 사실은 경자에게도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삶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무너졌는데 아무리 어른이라도 정신이 멀쩡하겠습니까? 엄마는 강하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아예 안 받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경자는 이 모든 것들을 복구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물론, 일생을 뒤흔들만한 큰 상처를 겪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올바른 방법에 기대야 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에도 기대지 말아야 했습니다. 가족과 친족이 남보다 무서운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걸 이미 경험했다면 세상 사람 아무도 못믿는다, 우리 둘이서 버텨내야한다고 마음을 다져먹어야 했습니다. 무기력한 이에게 종교는 마약이 될수도 있다는 걸 경자는 몰랐습니다. 마약에 흐려진 눈은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작 가장 큰 상처를 받은 딸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경자는 딸의 치료를 위해 신에 귀의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먼저 선희로부터 시선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선희는 마지막까지 엄마가 자신을 잡아주길 바랐지만 경자는 무시했습니다. 모녀의 시선은 마주치지 못한채 그렇게 영영 어긋나고 맙니다.



선희의 삶은 상처로 얼룩져있지만 판단력이 그렇게까지 흐려져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 딸을 나 몰라라한 주제에 간 이식이 필요해지자 급히 딸을 찾은 아버지에게 선희는 단호하게 대처합니다. 다루는 아픔이 너무 깊어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이 웹툰의 몇 안되는 사이다같은 장면입니다. 


노루가 죽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잘 살아가는 듯 했던 선희의 일상은 뻔뻔한 친가 측의 방문으로 급속히 무너집니다. 엄마를 걱정한 노루는 꿈에 찾아갑니다. 선희는 꿈 속에서도 노루의 손을 놓지 않고, 급기야 자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혼령의 발을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노루를 향한 선희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정작 딸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그것은 홀로 세상에 버려진 자신의 위안처일뿐이었다는 것을요. 비단 웹툰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발을 잘라버리는 불행한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노루의 발을 잘라버리는 선희는 더이상 엄마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받은 상처에서 기인한 악마같은 모습을 하고 있죠. 일촉즉발의 순간 노루의 친구 바야바가 등장합니다. 원래 이름은 바야바는 아닌데요, 이름에 나름 깊은 의미와 힌트가 숨어 있어 이 리뷰에서는 바야바로 대체합니다. 어쨌든 바야바는 발이 잘린 노루를 안고 탈출합니다. 아이는 어른을 낫게 하지 못한다, 넌 엄마를 낫게 할 수 없으니 네 스스로를 위한 일을 하라는 메시지를 남긴채, 선희에게 먹혀버리고 말죠.


그리고 노루는 처음으로,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비밀을 고백합니다. 다시 엄마의 딸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방법을 찾아헤맸지만, 사실 살아있는 동안 불완전한 자신에게 기대는 엄마가 부담스러웠노라고. 본인도 아홉살의 인생으로 살고 싶었노라고 털어놓습니다.


나도 그저 불완전한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노루의 절규에, 노루의 탈출을 저지하던 선희의 무의식은 스르르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순간 노루의 얼굴에는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결코 야생의 것들이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것 보지 못했다.
작은 새는 가지에서 얼어죽어 떨어질 것이다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 추호도 하지 않으며
 

D.H. 로렌스의 <자기연민>이라는 시 입니다. 경자도 선희도 자신의 인생이 너무 불쌍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어느정도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말로 치료되어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연민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얽매였고 종교에 귀의했으며 정확한 소통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유명한 밴드 오아시스의 보컬 노엘 갤러거를 아시나요?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어렸을 적 부모의 학대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체벌을 넘어선 수준이었고 때로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년시절의 아픔이 현재의 음악에 끼친 영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답합니다. 그건 과거의 일일 뿐이고 현재의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이죠. 자기연민이 없는 사람만큼 쿨한 것도 달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더랬죠. 최근 삼성동으로 이사를 하신 어떤 여사님과 너무나 대비된다는 생각, 저만 하나요?



EditorAnne

직업은 기자.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날의 웹툰 챙겨보기. 주말 일정은 늘 신사동의 한 만화카페에 칩거하기. 
인터뷰 때 늘 하는 질문, ‘혹시 웹툰 보세요?’ 놀라운 사실은 각양각색의 수많은 인터뷰이 중 웹툰을 보지 않는 이는 1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하여 오늘도 진지하게 외치는 바, 웹툰은 우리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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