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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 살랑이는 곳으로의 여행 [연합이매진]

등록일2017.03.06 07:52 조회수1026
공곶이 농장에 핀 하얀 수선화 [사진/임귀주]

(거제=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봄은 참 더디게 온다. 시간은 이미 봄의 문턱을 넘었지만 겨울의 꼬리는 매섭고도 길게 이어진다. 봄의 따스한 온기와 싱그러운 빛깔을 찾아 남쪽 바다로 향했다. 그곳에는 고대하던 봄의 기운이 시나브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르키소스. 수많은 처녀와 님프의 구애에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이다. 어느 날 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빠지고 만다. 그가 죽은 자리에서는 수선화 한 송이가 피어났다. 자기애나 자아도취를 뜻하는 '나르시시즘'의 유래다. 나르키소스의 운명은 비극적이지만 아무것도 대체할 수 없는 그의 수려함은 수선화로 다시 피어났다.

거제도 남동쪽 끝자락에는 매년 봄 화사하게 피어난 수선화가 사람들의 마음에 봄기운을 전하는 마을이 있다. 일명 '공곶이'. 지형이 궁둥이처럼 바다를 향해 튀어나왔다 해서 거룻배 '공'(鞏) 자와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땅이란 뜻의 '곶'(串) 자를 합쳐 붙인 이름이다.

공곶이는 예구마을 주차장에서 이정표를 따라간다. 예쁜 펜션이 서 있는 가파른 비탈을 10분 정도 걸으면 능선에 이르고 반대편으로 10분을 내려가면 공곶이에 닿는다. 능선에서 공곶이로 이어지는 길은 계단이 300개가 넘는 가파른 동백나무 터널이다. 붉은 꽃 내려앉은 끝 모를 터널은 마치 딴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 같기도 하다.

공곶이 농장 앞바다

◇ 수선화 피어나는 바닷가 마을

2월 초순 농장에서는 옥빛 바다를 배경으로 노랗게 핀 수선화의 물결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수선화의 푸른 줄기는 한 뼘만큼 솟아 봄날의 싱그러움을 알리고, 해안선을 따라 서 있는 종려나무는 이국적인 풍광을 선사했다.

"여긴 눈이 좀체 안 오는데 지난겨울은 추웠나 봐, 눈발도 날리고…. 종려나무 근처나 밭을 보면 제주도 수선화랑 이스라엘 수선화가 폈어. 좀 춥긴 해도 봄이 벌써 온 기라." 머리가 허연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마음껏 즐기다 가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밭 한쪽에선 하얀 수선화가 군락을 이루고, 종려나무 아래에선 하얀 꽃받침에 노란 꽃술을 품은 별 모양 수선화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3월부터 피어나는 샛노란 수선화는 4월 중순까지 공곶이를 노랗게 수놓을 것이다.

농장 끝자락에는 크고 작은 돌이 뒤섞인 몽돌해변이 있고, 시리도록 푸른 바다 건너에는 내도가 버티고 섰다. 해변을 따라 한껏 부드러워진 바람을 맞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영화 '종려나무 숲'에서 보았던 이국적인 풍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 이는 농장 주인인 강명식·지상악 부부다. 예구마을에 살던 부인을 선보러 와서 공곶이에 매료된 강 씨는 12년 후인 1969년 이곳에 터를 잡아 밭을 일구고 나무와 꽃을 심고 가파른 비탈에 계단을 놓았다. 이제 머리카락이 하얗게 된 부부는 지금 거제 8경 중 하나가 된 마을을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마음씨도 곱다.

김소엽 시인은 "봄은 겨울을 인내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다. 종려나무의 꽃말이 '승리'이듯이 봄날 공곶이에서는 시린 겨울을 이겨낸 뒤의 화사함을 접할 수 있다. 수선화를 보며 자기도취가 아니라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는 법도 배울 수 있다.

조선시대 왜적 방어용으로 쌓은 구조라 성벽

◇ 구조라에서 만나는 뜻밖의 가경(佳景)

예구마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 와현해수욕장이다. 초승달처럼 호를 그리는 조그만 백사장은 한낮 햇살에 하얗게 눈부시고, 생동감 넘치는 바다는 은빛으로 반짝인다. 연인들은 모래사장을 거닐다가 바닥에 낙서하고 사진을 찍으며 봄날을 만끽한다.

다시 해안도로를 5분 정도 달리면 아름다운 외도와 해금강을 운항하는 유람선이 출발하는 구조라다. 선착장에는 봄날의 외도와 해금강을 돌아보려는 이들이 길게 줄 서서 식지 않은 인기를 증명하고 있었다.

구조라는 유람선만 타는 장소가 아니다. 선착장 맞은편으로 '샛바람소리길' 이정표를 보고 빛바랜 벽화가 있는 골목길을 따라가면 뜻밖에 아름다운 풍경과 조우하게 된다. 오른편으로 구조라해수욕장의 맑은 풍경을 감상하며 계단을 오르면 이내 대나무가 하늘을 뒤덮은 숲길을 지난다. 방풍림으로 조성한 대나무가 지금은 길에 운치를 더하고 있다.

숲길을 지나 탁 트인 공간으로 나서면 조선 시대 왜적을 막기 위해 축조한 구조라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에 올라 주변을 둘러본다. 청옥 빛깔 바다와 아늑한 어촌 풍광이 눈을 시리게 한다. 탐방로를 따라가면 서낭당과 전망대에서 특별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바람의 언덕 아래에 있는 바람의 쉼터 탐방로

◇ 청춘을 유혹하는 해안 명소들

시원스런 해안 풍경을 감상하며 다시 20분을 달리면 학동몽돌해변에 닿는다. 몽글몽글 돌이 깔린 해변은 유명 관광지답게 가족, 연인,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물수제비를 뜨는 청춘들도 볼 수 있다.

10분 거리에는 바람의 언덕이 있다. 거제도 최고의 낭만 명소에는 유독 청춘들이 많다. 나무로 만든 산책로를 따라 잔디 깔린 언덕을 오르면 바람이 세차게 분다. 동백나무가 막아선 언덕의 끝자락에 이르면 풍차 뒤로 바다가 펼쳐지는 영화나 광고 속 장면이 펼쳐진다. 언덕 아래에는 바다 위에 다리를 놓고 힐링 공간을 조성한 '바람의 쉼터'가 있다. 좀 더 따뜻해지면 방문객은 지친 다리를 바닷물에 담그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돌아가는 길에는 담백한 '바람의 핫도그'도 하나씩 베어 물면 좋을 듯하다.

거제도 남쪽 해안은 여차~홍포 해안도로에서 마무리된다. 늦은 오후부터 해 질 녘 그곳 전망대에 서면 대병대도, 소병대도, 매물도 등 주변을 두른 섬들이 은빛이나 금빛으로 반짝이는 바다에 떠 있는 아름다운 풍광을 조망할 수 있다.

'조선업 메카' 거제는 요즘 불황으로 신음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지역 경기는 침체의 늪에 빠졌다. 어느 곳보다 지난겨울이 차갑고 길게 느껴졌을 것 같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봄을 가장 빨리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온화한 봄바람이 겨우내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녹였으면 바람이다.

여차~홍포 해안도로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3월호 [커버스토리]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03/05 08: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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